캘거리하늘가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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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7(주)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 사랑을(롬 14:16-20)
운영자 2024.11.19

2024년 11월 17일 캘거리하늘가족교회 (gajok.onmam.com) 주일예배(bit.ly/gajok) 입니다.

241117(주일예배)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 사랑을(롬 14:16-20) 갈등과 분열의 시대 오늘날 교회는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고 있다. 교회 안에는 첨예한 갈등으로 소송을 불사하고 용역(깡패들)을 동원하기까지 한다. 수면 위에 드러나지 않았어도 잠재적인 갈등으로 인해 은혜와 평강을 잃어가는 교회들도 많이 있다. 요즘 한국 교계는 이 도시도 동성애 이슈로 인한 내부 총질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런 세상에 성경이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는지, 오늘 로마서 14장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1. 로마 교회의 갈등 로마 교회 안에도 두 부류가 있었는데, 믿음이 강한 사람들과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었다. 믿음이 약하다는 것은 의지나 신앙이 약해서 쉽게 유혹에 빠지거나 우물쭈물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믿음 안에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는 약함, 즉 양심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연약을 의미한다. 약한 자들은 믿음이 주는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 이들은 구약 음식법에 따라 고기를 먹지 않고 채소만 먹었으며, 어떤 특정한 날들을 다른 날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고,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다. 이들은 음식과 날에 대한 유대적 규정들을 양심적으로 꼼꼼하게 지키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었다. 반면 믿음이 강하다는 것은 믿음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것을 먹으며(14:2), 유대 절기에 구속되지 않고 모든 날들을 동일하게 여기는(14:5)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인이었다. 이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아마도 믿음이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이 아직도 쓸데없는 전통에 매여 있어 너무 편협하다고 업신여기고 경멸한 것 같고, 약한 자들은 강한 자들이 자유분방한 자유주의자라고 비판하고 정죄한 것 같다. 그럼 이 교회를 어떻게 해야 할까? 쉽고 편하게 강한 자들의 교회와 약한 자들의 교회로 분열하면 될까? 2. 바울의 가르침 - 서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라. 사실 바울은 강한 자들과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강한 자들의 손을 들어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으라는 권면으로 시작한다. “받으라”는 표현이 이미 공동체를 전제하고 있다. 강한 자들이 다수이고 힘이 있으니 영향력이나 책임이 더 있으니 그들에게 먼저 권면하고 있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얼마든지 비판하고 논쟁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아가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 양자에게 권면한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있는 그대로 서로를 인정하라.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이미 받아들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들도 아들로 딸로 받아주셨으니 이제 서로가 형제가 되었는데, 나와 다르다고 그를 배척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신앙이기 때문이다. 오직 주인만이 자기 종의 행위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 우리는 서로 인정할 뿐이다. 1) 그게 뭐라고, 그건 본질이 아니야 바울은 두 그룹 간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데에 별로 관심이 없다. 바울은 옳고 그름에 강조점을 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의 화목과 덕을 세우기에 강조점을 두었다. 여기서 바울의 강조점은 양측의 견해 차이가 공동체의 통일성을 깰 만큼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는데 있다. 모든 것을 먹든 채소만 먹든, 또 어떤 특정한 날들을 소중히 여기든 모든 날들을 동일하게 여기든 그것은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하면 될 일이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14:5) 이것은 양비론인가? 둘다 양보해서 조화를 이루라는 것인가? 아니다. 바울은 복음의 본질적인 문제 가령 동정녀 탄생, 대속의 죽음, 구원받는 방식(믿음이냐 행위냐), 육체적인 부활 등의 문제에 있어서는 단호한 태도로 비판하고 엄격하게 바로 잡았다. 갈라디아교회의 문제는 복음의 핵심을 변질시키는 율법주의 의식의 문제였다. 골로새교회의 문제는 영육 이원론 영지주의에 근거한 금욕주의 천사숭배의 이단 문제였다. 그러나 여기 로마교회의 문제는 복음의 본질을 변질시키는 이단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고기와 포도주, 명절과 관련된 양심상의 의견 차이 문제라고 본 것이다.. 바울은 본질적인 문제에는 단호했지만, 비본질 문제에서는 매우 부드럽고 온화한 어조로 서로 받아 들이고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권면한다. 2) 중요한건 동기와 목적이야 그리스도인에게 더 중요한 것은 행위의 동기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떤 동기로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믿음이 강한 자도 주님을 위하여 먹고, 믿음이 약한 자도 주님을 위해 먹지 않는다면 행동을 달라도 동기와 목적은 같은 것이 아닌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를 위해서라면, 그 방법의 차이는 인정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위해 살거나 자기를 위해 죽는 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먹어도 주를 위해 먹지 않아도 주를 위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이 정체성을 붙들고 행동한다면 주님은 무슨 행동이든지 그를 받아주신다. 판단하실 분은 오직 주님이시다. 우리는 내 기준으로 형제를 비판하거나 업신여길 수 없다. 이러한 태도는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책망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비판하지 말고 서로를 용납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3) 사랑 안에서 공동체의 덕을 세우라 음식 문제에 있어 그러니까 사소한 일로 어느 한쪽의 강요나 억압으로 말미암아 다른 쪽의 형제가 근심하고 실족하게 된다면, 이것은 사랑으로 행하지 않은 것이라고 가르쳐준다. 강한 자는 약한 자에게 자신의 확신을 과시하거나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발견하는 중요한 원리는 사랑으로 행하라는 것이다. 나의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해서인지, 상대를 사랑함으로 인한 것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비록 선한 의도를 가지고 했을지라도 결과가 근심을 가져오거나 실족케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본질적인 관점에서 볼 때 무엇을 먹고 마시느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건 비본질적인 것이고, 하나님 나라의 본질은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 먹고 마시는 사소하고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라 거시적인 의와 평강과 희락을 이루어 가야 한다. 먹고 마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화평과 덕을 세우는 것이다. 중요하지도 않은 사소한 음식의 문제로 인해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해서는 안된다. 우리 시대에 주는 바울의 가르침은 “사소한 차이는 인정하면서 중요한 것은 동기와 목적이니 우리가 주를 위해 살아가는 주의 것임을 기억하면서 사랑 안에서 공동체의 화평과 덕을 세우라”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다. 마무리 이러한 바울의 가르침을 좀더 짧고 간결하게 요약한다면,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 사랑을”이라 하겠다. 17세기 독일 신학자 멜데니우스(Rupertus Meldenius, 1582-1651)의 말이다. 오늘날은 종교로 인한 테러와 폭력, 전쟁까지도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기독교 안에서도 갈등과 분열을 거듭하고 있다. 우리 시대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라는 의와 평화와 희락은 가볍게 여기고, 비본질적인 먹고 마시는 것과 같은 사소한 것들에 너무 열정과 힘을 쏟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우리는 같은 것을 크게보고 같은 것을 찾기보다 다른 것을 크게 보고서 틀렸다고 생각한다.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면, 꼭 일치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며, 다양성을 통해 더욱 풍성해지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오늘날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비본질적인 것까지 자기 생각과 일치하지 않으면 서로 적대시하는 경향이 있다.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비본질인지 각자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쉽지 않은 현실이다. 본질의 영역을 넓힐수록 다양성과 관용은 좁아질 것이고, 비본질의 영역이 넓어진다면 조화와 상생의 세상이 될 것이다. 나태주 시인은 ‘꽃이 사람이다’에서 "품으려고 하면 잡초도 꽃이고 베려고 하면 꽃도 잡초다"라고 했다. 우리가 잡초라고 이름 붙이고 쓸모없다고 뽑아내려 하지만, 그것 역시 하나님의 걸작품이다. 나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을,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사랑이 우선이다. 우리가 만들어가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문제가 아니라 의와 평강과 희락이 본질이다. 하나님의 자녀됨으로 우리가 형제라면 그 어떤 차이도 사소할 뿐이다. 틀림이 아니라 다름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풍요로움을 보여주면 좋겠다. 물론 틀림을 다름이라 우길 수는 없다. 비본질을 본질로 둔갑시키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타협이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의 원리는 사랑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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